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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합천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합천이씨)

 

본관(本貫): 합천(陜川)

시조(始祖): 이개(李開)

유래(由來):

 

합천 이씨(陜川李氏)의 시조(始祖) 이개(李開)는 서라벌(徐羅伐) 6부 촌장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개국 초에 가수 호장(嘉樹戶長)을 지냈고 강양(江陽 : 지금의 합천)으로 이거(移居)하여 합천 이씨(陜川李氏)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세계(世系)를 계승해 오면서 가세가 번창하여 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를 포함하여 전서공파(典書公派병사공파(兵使公派) 등 크게 11()로 갈라져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희민(李希閔)

1498(연산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효옹(孝翁). 지로(智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병조참판 순생(順生)이고, 아버지는 공조판서 윤검(允儉)이며, 어머니는 훈련원참군 최계한(崔季漢)의 딸이다. 조광조 ( 趙光祖 )의 문인이다.

1510(중종 5) 진사가 되고, 151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이듬해 정자를 거쳐 지평 ·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정국공신 ( 靖國功臣 )에 외람되게 기록된 사람을 공신에서 삭제할 것을 논핵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밤, 이연경 ( 李延慶 ) · 권장 ( 權檣 )과 함께 궐문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관직이 이미 삭탈되었다 하여 제지를 당하였다.

그는 경연청 ( 經筵廳 )에 들어가 영상에게 고하기를, “ 사건이 갑자기 생기고 관직은 이미 삭탈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시종반열(侍從班列)에 있는 몸으로 이런 큰 변을 보고 모르는 체하고 물러설 수 없습니다. , 좌우에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없으면 국가대사가 민멸(泯滅 : 절멸하며 없어짐)되어 전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민망스럽습니다. ” 라고 하였다.

영상이 봉교 조구령(趙九齡) · 채세영 ( 蔡世英 ) · 권예(權 畝 )를 시켜 전과 같이 사건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그 해 12월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선산에 돌아가서 살았다

 

이희증(李希曾)

1486(성종 17) 1509(중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노옹(魯翁), 호는 월휘당(月暉黨). 증병조참의 지로(智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병조참판 순생(順生)이고, 아버지는 참판 윤검(允儉)이며, 어머니는 참군 최계한(崔季漢)의 딸이다. 이원(李 復 ) · 정여창 ( 鄭汝昌 )의 문인이다.

1502(연산군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06(중종 1)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하였다. 1507년 예문관검열 · 대교를 역임하면서 사학 ( 史學 )의 중요성을 거론, 사학이 있어야만 시비가 명백하여지고, 시비가 명백하여지면 천하만세의 공론이 밝아질 것이라 피력하였다.

또한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각 대에 사씨(史氏)가 있어 시사(時事)를 기록하되 사실에 입각하여 직서(直書)하여왔음을 강조하면서, 무오 · 갑자사화 때 사법(史法)을 어지럽힌 자에게는 그 경중에 따라 처벌하고, 사사(史事)로 억울하게 죽은 자들은 모두 봉증하여 실추된 사법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08년 예문관봉교 재임시, 이극돈(李克墩)이 사국(史局)의 일을 누설하여 무오 ·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죄를 추론, 사림의 억울함을 풀고 나아가 직필의 기회를 마련하여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그 해 사간원정언 · 홍문관수찬을 역임하였다. 합천 옥계사 ( 玉溪祠 )에 제향되었다

 

이희안(李希顔)

 

1504(연산군 10)1559(명종 1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우옹(愚翁), 호는 황강 ( 黃江 ). 초계 출신. 증병조참의 지로(智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순생(順生)이고, 아버지는 참판 윤검(允儉)이며, 어머니는 참군 최계한(崔季漢)의 딸이다. 교리 희민(希閔)의 아우이다. 김안국 ( 金安國 )의 문인이다.

10세 때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1517(중종 1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38년 이언적 ( 李彦迪 )의 추천으로 참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그 뒤 1554(명종 9)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학덕과 명망으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학자)로 천거되어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곧 사직하였다.

그 뒤 군자감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조식(曺植)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초계의 청계서원 ( 淸溪書院 )에 제향되었다.

 

 

李福老(이복로)의 묘갈명

 

李福老(이복로) 睿宗 1年 己丑(1469)~ 中宗 28年 癸未(1533) 65.

字 百順. 號 雙峰, 陜川人. 安東都護府使 瑤曾孫

 

一直面(일직면) 명진동 향로봉 남록 속칭 향교 골에 이공의 묘가 있다. 협천 이씨가 안동에 인연된 것은 공의 증조부 ()가 공민왕 11(1362) 안동판관으로 재임하였다가 조선개국 후 태조 2(1393)에 부사로 부임하여 안동과 인연이 되어, 공이 생원 南八俊(남팔준)의 사위가 되어 일직에 정착하게 된 듯하며 淸儉自修(자수자수)하고 힘써 공부를 하여 연산군 1(1495) 사마 兩試(양시)에 합격하고 중종 8(1513)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龜村閑話(구촌한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아니한다. 묘소는 부인 남씨와 쌍분이며 階下(계하)에 아들 四至堂(사지당) 壽慶(수경)과 손자 洛庵(낙암) 種善(종선)의 묘가 연분으로 入葬(입장)되어 있다.

 

墓碣銘(묘갈명)

郡守 李福老墓 在一直縣 鄕校峯 巽向之原 大司諫 魚得江 墓碣撰 幷序

公諱 福老 字百順 陜川人 曾祖諱瑤正憲大夫領安東大都護府事 王父諱仲卿通政大夫奉上寺事 考諱仲卿通政大夫狼川縣監 妣沈氏豊山君諱眞之女 成化己丑九月初三日 生公于京邸 力學博聞文章富瞻捷 弘治乙卯生員兼進士 癸酉表憑下文科及第 由成均典籍 出監河東縣務 六期秩滿 入爲校書校理戶曹正郞慶尙都事奉常判官 求僻郡 春病得草溪 丁亥春 赴任六期將滿 辛卯冬以病去郡 公聚進士南八俊之女于 安東之一直縣卽家鄕也 癸巳七月十一日卒于家 得壽六十五 有五子 曰 壽慶 春慶 裕慶 成慶 保慶 成慶楗乙酉進士 是年十二月十六日葬于家山乾坐巽向之原 淸儉悃愊 不修邊幅 所至晏如頗事世情 坐此蹉跑 在郡和敀去來辭歸田閑居 賦以見志囙 所居之山以雙峰爲號 有龜村閑話 五輪全書 幽閨精選 在遺藁中 在河東以詩简相許 訪我款淡及 爲都事简守 奧川從遊東都以 至山房當有唱和諸孤以 余知公心事 躬請碣銘 我不堪辭 銘曰 淸儉詞華 世所深忘 鄕稱善人 史作循吏 錐不大施 于後甚昌 芝蘭滿庭 所貴純陽 勒名貞石 以告後昆 詞非幼婦 不扝老存

皇明嘉靖朝鮮九葉 歲乙未二月日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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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군수 李福老(이복로)의 묘는 一直縣(일직현) 鄕校峯(향교봉) 巽向(손향) 둔덕이 엤다.

대사간 魚得江(어득강)이 묘갈명을 찬하도다.

 

공의 휘는 福老(복로)이고 자는 百順(백순)이며 陜川人(합천인)이다.

증조부의 휘는 瑤正(요정)으로 헌대부령안동대도호부사를 역임하였고, 조부의 휘는 仲卿(중경)으로 통정대부봉상사사, 부친의 휘는 仲卿(중경)으로 통정대부낭천현감을 역임하였다.

모친은 豊山君(풍산군) 沈眞之(심진지)의 딸이며, 성화 기축 93일에 공을 서울에 있는 집에서 낳았다. 힘써 공부하고, 많이 들어서 문장력이 놀라 정도로 높았다.

弘治(홍치) 을묘 생원 겸 진사에 오르고, 계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전적을 거쳐 河東(하동) 현무에 나가 육기의 임무를 다 하고 교서교리호조정랑경상도사봉상판관이 되었지만, 벽지의 군으로 가기를 청하였는데 봄에 草溪(초계)에서 병을 얻었다.

정해 봄 육기장을 다 마치고, 신묘 겨울 병으로 군을 떠났다.

공은 진사 南八俊(남팔준)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안동의 일직현이 고향이다.

계사 711일 집에서 65세 때 ()하였다.

아들이 5명이 있는데 壽慶(수경), 春慶(춘경), 裕慶(유경), 成慶(성경), 保慶(보경)이라 하는데, 成慶(성경)은 을유년 진사가 되었다. 같은 해 1216일에 집안 산 乾坐(건좌) 巽向(손향) 둔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진실 되고 정성스러우며, 삿된 것을 익히지 아니하고 편안하게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고 따랐다. 이와 같이 하며 군에서 살다가 사표를 내고 전원으로 돌아가 한가롭게 살게 되었다.

()에서 밝힌 뜻을 보면, 사는 곳에 산이 雙峰(쌍봉)이라서 호를 雙峰(쌍봉)이라 하였다. 龜村閑話(구촌한화), 五輪全書(오륜전서), 幽閨精選(유규정선)등이 遺稿(유고) 중에 있었다.

河東(하동)에서 서로 편지를 주고받다가 나를 찾아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였다. 都事(도사)의 글을 지키기 위해 강을 따라 안동에서 놀다가 山房(산방)에 이르렀는데 많은 사람들 함께 唱和(창화)하기를, 그대는 ()의 심사를 알므로, 몸소 그대에게 碣銘(갈명)을 청한다.하니 나는 감히 사양 할 수가 없어 명을 말하노라.

 

청렴하고 검소하며 시문에 재주가 있고

세상 일 다 깊이 잊고 사니

마을 사람들이 착한 사람이라 일컫네.

역사는 관리들에 의해 돌고 도는데

크게 베푸는데 인색하지 아니하니

후세는 번창하고 가문도 떨쳐나가네.

똑똑한 자손들 뜰 안에 가득하고

모두가 귀한 純陽(순양)의 성품을 지녔네.

정한 돌에 명을 각하여

먼 날까지 후손들에게 고하고 하니

적는 ()는 어리지 아니하고

훼손되고 늙지 아니하며 길이 남을 것이다.

 

황명 가정 조선구엽 을미2월일 세움.

 

 

 

 

 

 

출전 <한미녹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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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합천 이씨는 남한(南韓)에 총 23,951가구, 98,5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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